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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도움되는 경제시사

1927년 6.10 만세 운동 만세 대신 침묵, 독립 대신 체념이 넘쳐나던 1920년대, 독립의 심장을 다시 뛰게한 만세 함성

by 멀리서 보면 모두 푸른달 2025. 6. 2.

일제의 탄압 속 민족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다 – 6·10만세운동의 역사와 의미

 

1926년 6월 10일, 서울 종로에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위가 아닌, 일제 강점기 내내 꺼지지 않던 민족의 염원이 다시 분출된 6·10만세운동이었습니다.
올해 국가보훈부는 이 운동을 6월의 독립운동으로 선정하며, 그날의 의미를 국민과 함께 되새기고자 합니다.

 

 

 

 

 

 

         <목차>

1. 1920년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침체와 분열

2. 1920년대 문학으로 엿보는 민족의 체념과 절망

3. 1926년 시대를 담아낸 영화, 드라마 <박열> <미스터 선샤인> <암살> 

4. 1926년 6월 10일, 체념과 절망을 저항으로 바꿔낸 만세 함성

 

 

 

 

 

 

 

 

 

1. 1920년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침체와 분열

 

📉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침체와 분열

 

1919년, 전국을 뒤흔든 3·1운동은 민족 독립에 대한 거대한 열망을 드러냈지만, 이후 일제는 더욱 강도 높은 무단통치와 탄압으로 대응했습니다.
수많은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서 사회주의계열, 민족주의계열 등으로 나뉘며 갈등이 심화되었죠.

또한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겉으로는 유화 정책을 펼치며 언론과 교육의 통제를 강화해 민족정신을 점차 말살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 민족운동은 점차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조선인 사회 전체에 무력감이 번져갔습니다.

 

📉 3·1운동 이후, 분열과 탄압 속에 침체된 민족운동

 

1919년 3·1운동은 국내외에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강력히 알렸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오히려 더욱 혹독한 탄압과 분열의 시간이었습니다.

 

🛑 무자비한 탄압과 투옥

 

3·1운동 직후, 일제는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투옥시켰습니다.

이승훈, 한용운, 김원벽, 최린 등 주요 인사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유관순 열사는 고문 끝에 옥중에서 17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독립운동의 ‘두뇌’와 ‘심장’이 무력화되자, 조직적인 저항이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갈라진 민족운동 진영 – 민족주의 vs 사회주의

 

1920년대 초, 독립운동 세력은 점차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한쪽은 교육과 문화,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 자강을 이루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
대표 인물: 안창호, 이상재, 이광수(초기) 등
주요 조직: 흥사단, 조선교육회, 동아일보 등

다른 한쪽은 노동자·농민 중심의 계급투쟁을 통해 일제를 전복하자는 사회주의 계열.
대표 인물: 박헌영, 김단야, 여운형(초기) 등
주요 조직: 조선공산당, 청년회, 소작인조합 등

서로 독립이라는 목적은 같았지만, 방법과 이념 차이로 인해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때로는 상호 비방과 갈등이 격화되어 단결된 민족운동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 '문화통치'라는 이름의 교묘한 지배

 

3·1운동의 국제적 파장을 의식한 일본은, 1920년대부터 강경 무단통치 대신 ‘문화통치’라는 유화 전략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이 역시 겉포장일 뿐, 본질은 민족정신 말살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한글 신문 발행을 허용했지만,
→ ‘동아일보’, ‘조선일보’에는 검열·정간·폐간 조치가 빈번했고
→ 1926년만 해도 동아일보는 네 차례 정간, 조선일보는 사장과 기자들이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교육 기회를 일부 확대했지만,
→ 고등교육은 극소수만 접근 가능했고
→ 조선인 교원은 차별을 받으며, 교과서와 수업에서는 천황숭배와 일본어 교육이 강제되었습니다.

대표적인 문화통치 책임자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겉으로는 관용을 말했지만, 실제론 조선의 독립운동을 분열시키는 ‘유화책-분열책 병행’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 전 민족의 피로감과 무력감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과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은 진로를 고민하고, 민중은 먹고살기에 급급한 시기.
‘어차피 일본에게 독립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라는 체념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던 때였습니다.

1920년대 중반, 조선 사회는 일제의 억압과 내부의 분열로 인해 독립에 대한 희망이 점차 사라져갔습니다. "어차피 일본에게 독립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라는 체념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당시의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2. 1920년대 문학으로 엿보는 민족의 체념과 절망 

 

📚 문학 속에 담긴 민족의 절망

 

1920년대 조선의 문학은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민중의 절망과 체념을 반영했습니다.

김기진의 작품들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와 민중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독립에 대한 희망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실을 드러냈습니다.

김기진은 "문학은 무기다"라는 신념 아래,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작품을 발표하며, 독립에 대한 희망을 되살리려 노력했습니다.

 

📰 언론과 교육의 통제 강화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명목으로 언론과 교육을 통제하며, 민족의식을 억압했습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검열과 정간, 폐간 조치를 반복적으로 당하며, 자유로운 언론 활동이 어려웠습니다.

교육 현장에서는 일본어 사용이 강제되고, 한국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는 내용이 주입되며, 학생들은 민족 정체성을 잃어갔습니다.

 

 

 

 

 

 

🎭 대중문화 속 체념의 정서

 

1920년대 대중문화는 민족의 체념과 절망을 반영했습니다.

딱지본 신소설과 같은 대중문학은 사회 문제를 다루며, 민중의 고통과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가는 현실을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민중의 정서를 반영하며, 독립에 대한 체념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1926년의 시대상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 중,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그 속의 민중의 삶, 그리고 당시 지식인과 청년들의 갈등과 저항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들이 몇 편 있습니다. 특히 다음의 작품들은 6·10만세운동이 벌어지던 1926년 전후의 시대적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여기에 더해 ‘딱지본 신소설’과 같은 대중문학이 어떻게 1920년대 조선 사회의 분위기, 특히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체념이 퍼진 시대상을 반영했는지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블로그 글에 더욱 설득력 있는 서사가 됩니다.

 

📖 ‘딱지본 신소설’ 속 절망의 정서

 

❓ 딱지본 신소설이란?
‘딱지본’이란 소책자를 뜻하며, 주로 10~20페이지 내외의 저렴하고 간결한 인쇄물로, 시중에서 손쉽게 유통되던 대중문학 형태입니다. 내용은 로맨스, 고전소설 각색, 사회풍자, 염세적 서사 등이었으며, 1920년대 조선 민중의 정서와 삶을 빠르게 반영했습니다.

 

 

 

 

 

 

 

🕯️ 당시 딱지본이 보여준 정서: 체념, 방황, 소시민의 비애

 

신소설 속 주인공들은 종종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로 그려졌습니다.
예컨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출세할 길이 없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무기력해진 청년,
혹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신념을 접고 친일 관료 밑에서 일하게 되는 가장의 이야기 등입니다.

이러한 이야기 속 인물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보다는 현실에 굴복하고 체념하거나, 무의미한 일상에 갇힌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민중들의 절망을 그대로 투영했습니다.

 

📘 예시 작품: 이광수의 『흙』 (1925)

 

이 작품은 딱지본은 아니지만, 대중문학의 대표 사례로서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주인공 ‘허숭’은 지식인이지만 결국 시골로 내려가 농민들과 함께 사는 길을 택합니다.

이광수는 초기에는 민족계몽을 외쳤지만, 『흙』에서는 현실 개혁보다는 개인적 수양, 내면적 구제에 무게를 두면서 체념에 가까운 결말을 택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사회 전체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나 자신부터 지켜야 한다”는 식의 정서,
즉 독립운동보다는 체제 순응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민중의 심리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 민중의식의 왜곡과 탈정치화

 

일제는 이런 대중문학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검열 기준에 맞춰 사랑 이야기, 신파극, 가족 서사 등 현실 비판이 없는 문학이 대량 유통되었고,
그 결과 민중은 점점 정치·역사적 각성보다 감정적 위로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어차피 바꿀 수 없다면, 그냥 참고 사는 게 낫다”는 체념으로 이어졌습니다.

 

 

 

 

 

 

 

 

3. 1926년 시대를 담아낸 영화, 드라마 <박열> <미스터 선샤인> <암살> 

 

🎬 1926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표 작품들

  1. 🎥 <박열> (2017)
    감독: 이준익

출연: 이제훈(박열), 최희서(가네코 후미코)

배경 연도: 1923~1926년

줄거리 요약:
실존 인물인 박열은 1920년대 도쿄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아나키스트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일본 황태자 암살을 계획했다는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지만, 오히려 법정에서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당당히 폭로합니다. 일본인 연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목숨을 걸고 민족의 자존과 저항을 선언한 이야기입니다.

1926년 현실 반영 포인트:

박열이 사형선고를 받은 해가 바로 1926년입니다.

영화는 당시 조선인에 대한 탄압, 황국신민화 정책, 조작된 재판, 검열과 선전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본에서조차 조선인을 테러리스트로 만들기 위해 일제가 어떤 방식으로 조작하고 언론을 이용했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1. 📺 <미스터 션샤인> (tvN, 2018)
    배경: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반 (1900년대 초~1910년대 후반 중심이지만 연장선으로 1920년대 분위기 반영)

줄거리 요약:
미국으로 도망쳤던 노비 출신 주인공이 미군 장교로 조선에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실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여러 인물들과 일본에 협력하는 지식인 계층의 이중성, 분열된 조선 사회의 모습을 극적으로 그려냅니다.

 

 

 

 

 

 

1926년 현실 반영 포인트:

극 중에 나오는 의병 활동, 사회혼란, 친일 관료의 부상,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 등은 1920년대 조선 사회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구한말 유산을 가진 채 식민지 조선으로 전락한 민중의 무기력함과 저항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1. 🎥 <암살> (2015)
    감독: 최동훈

출연: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배경 연도: 191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줄거리 요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뢰를 받아 친일파 암살 작전을 수행하는 독립군 특공대의 이야기.
허구의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실제 있었던 인물과 사건(김원봉, 의열단 등)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습니다.

 

1926년 현실 반영 포인트:

영화 전반에 걸쳐 일제 경찰의 탄압, 밀정, 친일파의 배신, 조선 민중의 감시와 두려움 속 삶이 생생히 묘사됩니다.

특히 서울 거리를 장악한 헌병, 조선인 사이에 퍼진 불신과 고립, 자유를 향한 독립군의 목숨 건 결단은 6·10만세운동 당시 청년들의 상황과도 매우 닮아 있습니다.

 

🕯️ 작품 속 장면으로 보는 1926년의 조선 – 암울함과 불꽃

 

이들 작품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는 1926년의 조선은 이런 모습입니다:

거리에는 일본 군복을 입은 헌병들이 삼엄한 눈빛으로 조선인을 감시하고 있고,

민중은 신문을 숨겨 읽거나, 입조차 함부로 열지 못하며,

 

친일 관료들은 권력을 누리며 동포의 고통에 눈 감고,

청년들은 학교에서조차 사상의 감시, 검열, 차별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답답한 공기 속에서도 누군가는 비밀결사를 만들고, 전단지를 돌리고, 거사를 준비합니다.
이들은 ‘성공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안고도, 독립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을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26년 6월 10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6·10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체념과 절망 속에서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되살리려는 민족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4. 1926년 6월 10일, 체념과 절망을 저항으로 바꿔낸 만세 함성

 

🕯️ 순종의 장례와 민족의 감정 폭발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서거했습니다.
민중에게 순종은 망국의 상징이면서도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지 황제의 죽음을 넘어, 일제 강점 하에서 억눌려 있던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례일로 지정된 6월 10일, 장례 행렬이 서울 시내를 지날 예정이라는 점에 주목한 학생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결의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닌, 조직적이고 치밀한 항일 운동으로 기획된 사건이었습니다.

 

🎓 학생들의 결단 –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만세운동 준비

 

당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서울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비밀결사였습니다.
이들은 3·1운동 이후로 침체된 민족운동에 문제의식을 갖고, 다음 세대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습니다.

운동은 철저한 비밀 속에 준비되었습니다.

격문 작성 및 배포: “민족을 살리자”, “조선은 죽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담긴 격문이 서울 전역에 뿌려졌습니다.

시위 동선 조율: 순종 장례 행렬의 경로에 맞춰 시위 시간과 장소를 사전에 정했습니다.

연합 조직 구성: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성향의 학생들이 사상 차이를 넘어 연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26년 6월 10일, 장례 행렬이 종로 일대를 지나던 그 순간, 학생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수많은 시민이 이에 호응했습니다.
서울뿐 아니라 평양, 대구, 진주, 광주, 원산 등지에서도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날 하루, 전국에서 약 2,000명 이상의 학생과 시민이 체포되었고, 많은 이들이 모진 고문과 옥고를 겪어야 했습니다.

 

🔥 6·10만세운동의 성과와 역사적 의미

 

6·10만세운동은 단지 하루의 시위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정신은 다음 해인 1927년, 민족 협동전선 ‘신간회’ 창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진영이 이념을 넘어 협력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국내외 항일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학생 주도의 민족운동은 이후 광주학생항일운동(1929), 대한독립청년단 결성, 해외 유학 독립운동가의 성장 등으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6·10만세운동은 시대의 절망 속에서 학생들이 다시 민족의 희망을 일으킨 역사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는 그들이 치열하게 맞섰던 용기 위에 놓여 있습니다.
올 6월, 그날을 기억하며 역사의 주체는 언제나 ‘깨어 있는 시민’과 ‘깨어 있는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 6·10만세운동 요약 정리

 

발생 시기: 1926년 6월 10일

배경: 순종 황제 장례일, 일제의 통치 강화와 민족운동 침체

주도 세력: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학생들

운동 방식: 격문 배포, 장례 행렬 연계 만세 시위

의의: 신간회 창립의 계기, 학생운동의 출발점, 항일민족연대의 기반

🗓️ 1926년 6월 10일, 우리는 기억합니다.
학생들이 일으킨 만세의 함성, 민족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