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조선은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병합되었고, 이후 한국의 주권은 일본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한일합방(韓日合邦)" 또는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르며, 이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를 막기 위해 투쟁했던 많은 인물들이 존재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한일합방과 저항운동을 중심으로 네 개의 소제목을 설정하고, 개입된 주요 인물들을 통해 사건의 흐름을 조망해 보겠습니다.
대한제국의 몰락과 고종의 저항: 마지막 황제의 몸부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고종(高宗, 1852~1919) 은 국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일본의 강압에 의해 퇴위당했습니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며 자주독립을 선포했지만, 국제 정세는 대한제국에게 불리하게 흘러갔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露日戰爭)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시작했고,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습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국제법상 불법임을 알리고, 이를 무효화하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The Hague Peace Conference)에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이때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이 특사로 참여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조선의 입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 순종(純宗)을 즉위시켜 더 쉽게 대한제국을 장악했습니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매국과 저항 사이: 이완용과 최익현의 대립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한국 내부에서도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극명하게 나뉘었습니다.
한일합방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완용(李完用, 1858~1926) 이었습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던 대표적인 친일파였습니다. 그는 "대한제국이 더 이상 독립을 유지할 힘이 없으며,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이 최선"이라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강요에 따른 것이었고,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포기하는 결정이었습니다.
이에 맞서 조선의 독립을 지키려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최익현(崔益鉉, 1833~1907) 입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며, 항일 의병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나라가 망할지언정 왜적 밑에서 살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의병은 점점 밀려났고, 최익현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끝내 순국하였습니다. 그의 희생은 이후 독립운동가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향을 미쳤으며, 훗날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총성으로 울린 저항의 신호
한일합방의 실질적인 설계자로 평가받는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입니다. 그는 일본의 초대 총리이자,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총책임자 역할을 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주도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장본인으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사실상 주도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1879~1910)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은 권총을 꺼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나, “나는 조선 독립군의 장군으로서 침략자를 처단한 것이다”라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일본의 침략을 강력히 규탄하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1910년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했지만, 그의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의 중요한 이념이 되었습니다.
국외에서 이어진 독립운동: 김구와 윤봉길의 투쟁
한일합방 이후에도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일본에 저항하였습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들이 바로 김구(金九, 18761949)와 윤봉길(尹奉吉, 19081932)입니다.
김구는 한일합방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조선이 독립하는 그날까지 싸우겠다"며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가 바로 윤봉길이었습니다. 윤봉길은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고위 관계자들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감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독립운동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도 감탄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체포되어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그의 거사는 한일합방 이후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다시금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일합방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이에 저항한 수많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고종과 헤이그 특사들은 외교적 저항을, 최익현과 의병들은 무장 항쟁을, 안중근은 저격을, 김구와 윤봉길은 국외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일본에 맞섰습니다.
이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독립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일합방은 대한민국을 향한 고난의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독립운동의 불꽃을 지핀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남긴 정신을 기억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이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