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음악적 민족주의: 조선을 노래하다
이흥렬(李興烈, 1909~1980)은 한국 가곡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곡가로, '봄맞이', '녹턴' 등의 아름다운 가곡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삶을 단순한 음악가로만 평가하기에는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존재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초반, 그는 민족의식을 음악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1930년대는 한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이흥렬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초기에는 서양 음악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통적인 가락을 서양식 화성법과 결합하여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했으며, 이를 통해 일제의 문화적 동화 정책에 맞서 한국적인 정서를 지키려 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 독립운동과의 연관성을 찾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 그의 행보는 달라지게 되며, 이후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친일 행적: 문화적 협력인가, 시대적 굴복인가?
이흥렬의 친일 행적은 1940년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조선의 문화예술계를 동원하여 전쟁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 시기, 이흥렬은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반영하는 음악을 작곡하고 공연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가 작곡한 대표적인 친일 음악으로는 ‘성불사의 밤’과 ‘결전 태세가’ 등이 있다. 이러한 곡들은 일본의 전쟁 동원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그가 일제의 정책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그는 조선 음악협회의 활동을 통해 일제의 문화정책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전시 동원 체제 속에서 일본 제국을 찬양하는 음악회를 여는 데도 관여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음악을 지속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반대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쳤다는 비판도 있다. 해방 이후 그의 이러한 행보는 오랫동안 문제시되지 않았지만, 2000년대 이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면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해방 후의 평가: 음악적 업적과 역사적 논란
해방 후 이흥렬은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대한민국 음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음악 교육과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가곡 작곡과 음악 교육에 힘쓰며, 후학 양성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은 점점 더 부각되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면서, 그는 단순한 음악가가 아니라 친일 행적을 가진 예술인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적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그가 일제강점기에 보인 행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맞서고 있다.
이흥렬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복합적인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민족주의적 정서를 담은 음악을 작곡했던 그가, 일제 말기에는 친일 행적을 보이며 논란의 중심에 선 점은 역사적 평가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음악가로서 그의 공로는 남아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 깊이 있는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