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로서의 현제명: 음악으로 민족의식을 깨우다
현제명(玄濟明, 1902~1960)은 한국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작곡가이자 지휘자로서 한국 서양음악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특히 한국 가곡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단순한 음악가로만 기억되기에는 그의 삶이 너무나도 복잡하다. 현제명은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하며 민족의식을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1920년대 현제명은 일본 도쿄에서 음악을 공부하면서 조선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한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으며, 당시 조선 청년들에게 음악을 통해 민족정신을 심어주려 했다. 특히 그의 곡 중 일부는 독립운동가들이 애창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당시 한국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접목하여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하면서도, 조국의 현실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행적은 후에 그를 애국적 음악가로 평가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가 걸어온 길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특히 1930년대 이후 그의 행보는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친일 음악가로의 전환: 문화적 협력인가, 생존을 위한 선택인가?
1930년대 후반부터 현제명의 행보는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바뀌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문화 예술계를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전쟁을 정당화하고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제명은 조선 음악계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며 일본 당국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특히 그는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1943년 조선음악협회 회장을 맡아 일본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음악회를 조직하고, 친일 성향이 짙은 음악을 작곡하거나 공연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음악적으로 실현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대표적인 친일 행적으로는 일제가 주관한 전시가요(戰時歌謠)를 작곡한 것이 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그는 해방 후 친일파 명단에 오르기도 했으며, 이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그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선택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일본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면죄부를 주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많다.
해방 후의 평가: 애국 음악가인가, 친일 음악가인가?
광복 이후 현제명은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해방 후 대한민국 음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국립음악학교(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초대 교장이 되었고, 한국 음악 교육과 가곡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군가를 작곡하는 등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음악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부각되었다. 2000년대 이후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등재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친일파로서의 면모가 더 강조되었다. 반면, 그가 한국 가곡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있다.
현제명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 친일 행적을 보이며 역사적 논란에 휩싸이게 된 점은 그의 음악적 업적과 별개로 신중한 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다. 음악가로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단순한 흑백논리가 아닌, 보다 깊이 있는 역사적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