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완용, 우리나라의 근대시대를 바꾼 인물

by 멀리서 보면 모두 푸른달 2025. 3. 16.

을사조약 체결과 매국 행위 논란

이완용은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관직을 역임하며 국가 정책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역사적으로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사건은 1905년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에 가담한 것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완전히 박탈되었고, 사실상 국권이 유린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완용, 우리나라의 근대시대를 바꾼 인물
이완용, 우리나라의 근대시대를 바꾼 인물

 

을사조약은 조선의 고종 황제가 직접 서명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적인 외교적 압박 속에서 이완용을 비롯한 다섯 명의 대신이 동의하면서 체결되었다. 이완용은 당시 대한제국의 내부대신(현재의 내무부 장관 격)이었으며, 조약 체결을 주도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조약 체결 이후 그는 일본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으며 총리대신까지 올랐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와 국민들은 이완용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강한 비판을 이어왔다. 을사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되었지만, 그 안에서 적극적으로 일본에 협조한 그의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을사조약 당시 고종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다섯 대신(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송병준)의 책임을 묻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의 통제 아래 대한제국의 독립은 점차 무너졌으며, 결국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

 

한일병합과 적극적 친일 행적

이완용은 단순히 을사조약 체결에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이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하며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데 앞장섰다. 조약 체결 이후 그는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고, 상당한 금전적 보상을 받으며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조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특히 이완용은 조선 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그는 조선 귀족을 조직하여 일본의 통치를 돕는 역할을 했으며, 식민 통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정책을 지지하며 일본 경찰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은 행보는 단순한 조약 체결 이상의 반민족 행위로 간주되었고, 이후 그의 친일 행적은 조선인들에게 극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당시에도 이완용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으며, 실제로 1909년에는 독립운동가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완용의 최후와 역사적 평가

이완용은 1926년 사망했으나, 그의 죽음 이후에도 역사적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일본의 후작 작위를 받고 부유한 삶을 살았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극도로 부정적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대표적인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며 철저히 단죄하려 했으며, 현재까지도 그는 대표적인 친일파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당시 국제 정세와 대한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완용이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는 시각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소수의 의견일 뿐,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가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 행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그가 단순한 외교적 조약 체결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협조했다는 점에서 더욱 강한 비판을 받는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이완용과 같은 친일파 인물들의 재산을 환수하고, 그들의 행적을 역사적으로 기록하여 반성의 기회로 삼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그의 후손들에게 내려진 재산 상당 부분이 국가로 귀속되었다. 이는 그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평가가 여전히 단호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론적으로, 이완용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의 선택과 행보는 오늘날까지도 친일 행위에 대한 반면교사로 활용되고 있으며, 역사의 교훈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의 행적을 돌아보며 우리는 독립과 민족의 존엄성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