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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외세를 불러들인 야심가인가? 조선을 지키려 한 정치가인가?

by 멀리서 보면 모두 푸른달 2025. 2. 27.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 말기의 중요한 인물로, 한국 역사에서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다. 전통적인 시각에서는 그녀를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을 혼란에 빠뜨린 인물로 보거나, 반대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비운의 정치가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녀의 행적을 단순히 부정적 혹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의 복잡성을 놓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 글에서는 1) 조선의 외교적 위기 속에서 그녀의 선택, 2) 정치적 수완과 개혁 노력, 3) 비극적인 죽음과 그 의미를 중심으로 명성황후를 재해석해 보고자 한다.

 

명성황후, 외세를 불러들인 야심가인가? 조선을 지키려 한 정치가인가?
명성황후, 외세를 불러들인 야심가인가? 조선을 지키려 한 정치가인가?

외세를 끌어들인 간계인가? 조선을 지키기 위한 외교 전략인가?

명성황후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비판 중 하나는 그녀가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제 정세를 고려하면, 이는 단순한 실책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가운데, 명성황후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를 활용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일본의 위협이 더욱 커졌고, 이에 그녀는 러시아를 새로운 우방으로 삼으려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이 일본의 표적이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어느 한 나라에만 의존할 수 없는 현실적인 선택지였다. 만약 그녀가 아무런 외교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방관했다면, 조선은 더욱 빠르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명성황후가 추진한 외교 정책은 단순한 ‘외세 의존’이 아니라 약소국 조선이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하려 했던 전략적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권력욕이 강한 궁중 정치가인가? 개혁을 시도한 실질적 통치자인가?

명성황후는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조선 후기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특히 고종이 즉위한 후 초기에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쥐고 있었지만,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명성황후의 정치적 영향력이 본격화되었다.

그녀의 정치적 행보 중 주목해야 할 점은 개화 정책에 대한 관심과 개혁적인 시도이다.

(1) 개화 정책과 신식 군대 창설

그녀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위협 속에서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해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군사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는 보수 세력의 반발을 불러와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2)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며 강한 왕권을 원했던 반면, 명성황후는 개화 세력과 손잡고 신문물을 적극 도입하려 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명성황후는 청나라를 끌어들여 그를 실각시켰다. 이는 당시 권력 투쟁의 한 단면이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의 자주성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재정 개혁과 경제 정책

그녀는 일본과 서양 세력에 맞서기 위해 재정 개혁을 추진했으며, 이를 위해 국가 재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씨 일가의 권력 독점과 부정부패가 심화되었고, 이는 민중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명성황후는 분명 권력욕이 강한 정치인이었지만, 단순히 사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조선을 변화시키려는 개혁가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을미사변, 비극적인 죽음과 역사적 의미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미사변)은 조선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정치적 암살 사건 중 하나다. 일본이 그녀를 죽인 이유는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나 권력 다툼 때문이 아니라, 조선을 일본의 완전한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었다.

(1) 일본이 명성황후를 제거한 이유
명성황후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며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를 위협적으로 여긴 일본은 그녀를 암살함으로써 고종을 고립시키고, 조선의 완전한 장악을 시도했다.
(2)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 조선의 운명
그녀가 제거된 후, 조선의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명성황후는 당시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마지막 정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될 수 있다.
(3) 역사적 재해석: 피해자인가, 역사적 책임이 있는가?
그녀가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도 정치적 실책을 범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죽음을 단순한 정권 다툼의 결과로만 볼 수는 없다.
일본이 그녀를 암살한 것은 조선의 독립과 자주성을 짓밟기 위한 것이었고, 그녀는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지도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

명성황후는 단순한 권력가도, 무능한 왕비도 아니었다. 그녀는 조선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교적 선택을 해야 했던 정치가였으며,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지도자였다. 물론 그녀의 정책 중에는 실책도 있었고, 민씨 세력의 부패 문제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녀를 단순히 외세를 끌어들인 인물로만 보는 것은 역사의 복잡성을 놓치는 것이다.

그녀가 걸었던 길은 조선이 국제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뇌의 연속이었다. 명성황후를 평가할 때는 단순한 흑백 논리가 아니라, 그녀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현실과 조선의 생존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