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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근대문학의 개척자이자 친일 논란 문학가

by 멀리서 보면 모두 푸른달 2025. 3. 10.

이광수(1892~1950)는 한국 근대문학을 개척한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며 새로운 문학적 경향을 제시했지만, 일제강점기 동안의 친일 행보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이번 글에서는 이광수의 문학적 업적과 친일 논란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다.

이광수, 근대문학의 개척자이자 친일 논란 문학가
이광수, 근대문학의 개척자이자 친일 논란 문학가

근대문학의 개척자, 이광수의 문학적 업적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을 정립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1917년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면서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무정》은 주인공 이형식을 중심으로 교육과 계몽을 통한 민족의 근대화를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기존의 전통적인 한문소설과 차별화된 새로운 서사구조와 인물 유형을 제시했다.

그는 《무정》 이후에도 《개척자》, 《흙》, 《유정》 등의 작품을 통해 조선 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성장, 민족의 자각을 주요한 주제로 삼았다. 특히 《흙》은 농촌 개혁과 민족적 각성을 강조하며, 당시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작품들은 조선이 근대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교육과 계몽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이광수는 문학뿐만 아니라 사상가로서도 활동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조선인의 의식을 개혁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의 문학적 이념은 실용적이며 계몽적인 성격이 강했고, 이는 그가 주도한 신문과 잡지를 통해 확산되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조선인의 의식을 개혁하고, 조선 사회가 근대적 가치관을 수용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업적이 높이 평가되는 동시에, 그의 사상적 변화와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이광수는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민족주의적 계몽운동을 주도했지만, 이후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전환하면서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친일 행보의 시작, 왜 일본을 선택했는가?

 

이광수의 친일 행보는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민족 계몽을 강조하며 독립운동에도 관여했지만, 점차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되면서 일본과 협력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이 조선에 대한 동화 정책을 강화하자, 그는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황국신민화’를 강조하는 글을 다수 발표했다. ‘황국신민화’란 조선인이 일본 제국의 국민으로서 일본식 문화를 받아들이고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사상을 의미하는데, 이광수는 이를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조선이 일본과 하나가 되어야만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조선인의 일본어 사용과 일본식 교육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1940년대에 들어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다수 발표했다. 1943년에는 조선 청년들이 일본군에 자원입대해야 한다는 논설을 발표하면서, 조선인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이는 단순한 사상적 변화가 아니라, 적극적인 친일 활동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그의 역사적 평가를 크게 훼손한 요인이 되었다.

이광수의 친일 행보는 단순한 생존 전략이었는지, 아니면 진정한 사상적 전환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초기에는 민족주의자였으나, 조선의 독립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현실적으로 일본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그가 자발적으로 친일을 선택했으며, 단순한 협력 수준을 넘어 적극적인 친일 문학과 논설 활동을 전개했다고 평가한다.

 

친일 논란 이후, 이광수의 유산은 어떻게 평가되는가?

광복 이후 이광수의 행적은 급격히 바뀌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그는 친일 행적 때문에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법적 처벌은 받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이광수는 북한군에게 납치되었으며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결국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문학적 업적과 친일 행적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많다. 한편에서는 그가 한국 근대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이 여전히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정》, 《흙》 등의 작품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근대적 서사 구조와 계몽적 주제를 통해 시대를 반영하는 중요한 문학작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은 그의 문학적 업적을 무색하게 만든다. 한국 문학계에서는 그의 작품을 문학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의 친일 행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의 친일 논설과 황국신민화 선전 활동은 단순한 생존 전략이 아니라 적극적인 친일 행위로 간주되며, 이는 역사적으로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결국, 이광수의 유산은 복합적이다. 그는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위대한 작품을 남겼지만, 동시에 역사적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친일 인사로 기록되었다. 그의 문학을 평가함에 있어, 우리는 그의 문학적 업적과 친일 행적을 함께 고려하며, 문학과 역사의 관계를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로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동시에 친일 행적이라는 역사적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작품은 여전히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삶은 문학과 역사의 관계, 그리고 개인과 시대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